[프린지가 블랙리스트를 말한다]
1. 만남 - 우리는 정말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글_채민(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장)
지난 1월 22일 수요일 우리는 만났다. ‘예술가의 집’에서. 여기서 우리라 함은 서울프린지네트워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를 말한다. 블랙리스트 후속 조치 마련을 위한 자리였다. 먼저 서울프린지네트워크의 오성화 대표가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소개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린지를 배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석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함이었는데, 나는 이 상황이 조금 의아했다. 검열당한 단체가 검열을 시행한 단체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고, 블랙리스트시기를 어떻게 견뎌왔는지에 대해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 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내용은 우리가 앞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 프린지를 대표한 참석자 중 누구도 블랙리스트 기간의 프린지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문체부와 문예위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는 그 자리를 채운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모체는 1998년에 시작된 독립예술제다. 대학로 일원에서 23일 동안 84개 문화예술단체와 120여 편의 독립영화가 참가하여 5만여 명의 관람객이 지켜본 가운데 진행되었다. 다음해에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한국정원 야외무대 등 8개 실내•야외무대 등에서 진행되었다. 순수예술과 엘리트주의의 상징인 예술의 전당이 독립예술제의 무대가 된다는 것은 당시에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는지 다양한 매체에서 기사화되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프린지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제약이나 차별을 배제한다. 이러한 원칙은 그동안 소외되어왔던 비주류 문화예술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대안적 공론장을 가능케 했다.
프린지는 자발적 참여와 연대라는 프린지 특유의 축제공동체 문화를 지향해왔다. 프린지에 참가하는 예술단체들은 스스로 참가 여부를 결정하고 공연물을 자체 제작하는 형식을 취한다. 프린지에 참가하는 예술단체들은 축제의 주체로서 표현과 선택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프린지는 예술단체들에게 공연장과 무대, 음향, 조명 등의 기본설비, 기술스탭과 진행인력, 공동 프로그램의 제작 및 홍보활동, 마케팅과 박스오피스 등 공연에 필요한 행정적 지원을 제공한다. 심사과정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서울프린지 페스티벌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예술가들의 벙커 역할을 하고 있다. (인큐베이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듯)
프린지에는 기존 매체나 공간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차별이나 제약을 받는 다양한 예술과 문화적 실천들이 모여들었다. 프린지는 비평적 기준과 담론, 정책적 차별, 교육제도 및 직업적 관행 등에 의해 형성되는 주류와 비주류의 위계적 역학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일종의 ‘안전지대’였던 샘이다. 독립예술제는 흩어져 있던 비주류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폭발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힘입어 2000년에는 장르 중심으로 읽어낼 수 없는 예술이 부상한다. 이른바 다원예술. 이에 다양성 혹은 실험적 예술활동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지원사업이 시작되었다.
프린지는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의 ‘올해의 예술상’에 다원예술부문 수상,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공연예술행사 평가 최우수축제 A 에 선정, 이외에도 서울문화재단, 예술경영지원센터 및 마포구 등에서 다양한 수상경력이 있다. 2013년에는 서울시설공단과 MOU를 맺고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공간실험을 시작했다. 이는 여러 기관들이 프린지가 독립예술계 나아가 한국 문화예술의 공동 자산으로 성장할 수 있게 격려해준 사례들이었다.
2014년, 프린지는 17번째 축제의 이름을 <절대반역>이라고 지었다. 포스터에는 권위적인 청와대와 침몰하는 배의 이미지를 그렸다. 다음해 2월, 프린지는 아르코 창작지원사업 다원예술 부문에서 1차 탈락했음을 알게 되었다. 1차 선정자들을 통해서 애매하게. 전체공개 였던 결과 공지 방식이 그해 ncas에서 개별적으로 확인하도록 변경되었던 것이다. 오성화 대표는 심사결과가 전체공개로 변경된 것은 2005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민간 자율 기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되면서 예술인들이 이루어 낸 성과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심사결과 개별공개로의 전환은 문화예술의 역사가 퇴보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석연치 않은 심사과정, 지원사업 담당자 변경 등 여러 정황을 통해 프린지는 배제의 기운(?)을 감지했다. 2015년 프린지는 <올모스트 프린지>라는 이름으로 포럼을 개최하고 이 시기에 예술가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15년도 포럼의 주제들을 살펴보면 당장 올해 같은 제목으로 다시 포럼을 시작해도 될 만큼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일까.) 2015년 5월, 웹진 연극인에 발행된 <올모스트 프린지> 리뷰에는 다섯 가지 키워드가 등장한다. ‘청년’, ‘자립’, ‘공공성’, ‘동시대’, ‘상암(공간)’. 오늘날 숱하게 오르내리는 이 단어들이 2015년에 처음 한 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프린지는 다음해인 2016년에도 <올모스트 프린지>를 개최한다. ‘권리장전 2016_검열각하’와 함께 공동주최한 이 포럼에서 ‘이 시대 20대 예술이 가능한가’, ‘검열과 자유는 어떻게 맞서는가, ‘이 도시는 예술활동을 원하는가’를 주제로 이야기 나누었다. 정치적 제도적 검열과 일상적, 내면적 검열에 대해 토론하며 1부는 블랙리스트로 상징되는 내용, 2부에서는 연출과 대표의 권위와 위계 속에서 생기는 폭력에 대해 토론했다. 프린지는 사안을 건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취지로 담론활동을 지속했다. 독립예술가들의 지지자로서 ‘화학작용2’와 ‘권리장전 페스티벌’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혹자는 말한다 프린지와 대학로의 역사적 콜라보라고...) 조력자가 되고자 했던 프린지도 훗날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5월은 축제만 진행하기에도 숨이 차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린지는 다양한 예술가들과 함께 암흑의 시간을 이야기 하며 프린지의 역할과 방향을 다잡았다. 왜 그렇게 의연해 보이려고 했는지, 취소하지 않고 빚까지 내가며 축제를 지속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시절 프린지는 예술가가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15년 10월, 팝업씨어터 사태가 발생하고, 같은 해 11월, 아르코 창작지원사업의 다원예술부문은 폐지되었다. 오성화 대표와 정진세 작가는 기관과 예술가가 함께 성장해온 역사를 회고하며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때 현장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었던 예술행정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언질 한 번 해주지 않았을까.
2018년 블랙리스트 진상보고서에 대한 프린지의 입장문을 마지막으로 오성화 대표의 긴 설명이 일단락되었다. 우리 중 예술위 전효관 사무처장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본인도 조각조각 알던 사실을 정리해서 들은 것은 처음이라고. 문체부와 <블랙리스트 진상보고서>를 만든 김미도 교수는 블랙리스트로 인해 사라진 사업이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블랙리스트 가해자들이 현장에 복귀하고(언제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심지어 책을 출판했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문체부 예술정책 송윤석 과장은 재무담당으로 있을 당시 첫 번째 미션이 블랙리스트사태로 인해 축소된 사업을 원상복구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백퍼센트 가까이 살렸다고 생각했는데, 현장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복구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며 한계가 있었다고.
이 날의 만남을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국가폭력의 피해자와 후속조치를 위해 모인 우리. 참석자들의 다수는 블랙리스트를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했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들여다본다 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어서 말을 꺼낼 때 마다 위축된다. 나는 다른 참석자들에게서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내가 ‘우리’라는 단어로 잠시 묶어 본 까닭은 이 때문이다. ‘프린지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잘 모르는 우리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서로의 태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복구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다음 자리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나는 상상해본다. 블랙리스트 사태로 인한 예술가들의 고통을, 예술진흥원에서 예술위원회로 구조를 변경 했을 때 예술계의 기대감 혹은 승리감을. 이후 그만큼 컸을 상실감을. 오성화 대표와 정진세 작가가 경험했다는 예술행정가들과의 파트너십은 어떤 것 이었을까. 그것이 견고했더라면 블랙리스트에 제동을 걸 수 있었을까. 공모가 일종의 입시같이 변해버린 지금, 내게는 이 부분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다른 동료 예술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예술행정가들과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확실한 것은 앞으로 복구하는 과정에 있어 그들이 이야기 했던 파트너십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반성한다. 예술가라면 입시(공모) 준비가 아닌, 예술행정기관의 역할에 질문을 던져야 했었다. 아르코가 민간 자율기구라는 사실에 이제와 놀라다니. 권위와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모시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구나. 심사는 나의 예술과 관계없는 질문을 들으며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자리가 아니었구나. ‘예술가의 집’은 이런 이름을 달고 공모사업의 설명회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되는 구나. 앞 세대의 예술가들이 힘들게 일구어 놓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지켜봐야 했었구나.
프린지 블랙리스트 사태의 공론화와 복구 작업이 단절된 역사를 잇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프린지 세대교체 과정에서 일어난 단절이 어떤 지점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프린지 정신은 프린지 내부에서도 복기 하고 회복해야 하는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정신은 지금의 프린지와 프린지를 찾는 예술가들에게 절대반역의 좌표가 되어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훼손되었던 다원예술의 생태계도 활기를 되찾게 되지 않을까.
블랙리스트 기간 중 프린지가 의연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 안에서 상처 받았을 스탭들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블랙리스트 시행 기관에 속해 있던 개인들도 떠오른다. 정부기관은 트라우마 회복에 가장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 담당자의 입을 통해서도 덮어두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 그곳에서 어쩌면 죄책감과 부채감에 조용히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심리적 치유는 기관의 경계를 넘어 같은 시간을 지나온 ‘우리’로서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상처를 들여다 볼 때 시작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날에 대해 쓰고 있는 지금 블랙리스트 지시자들의 대법원 재판 결과가 나왔다. ‘원심판결을 법리오해 · 심리미진 취지로 파기 환송하는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 나쁜 소식이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판결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 진다. 갈 길이 험하다. 감히 우리라고 묶어 본 기관들의 대응도 궁금해진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잊지 말아야 한다고들 한다. 기억하는 방식이 고통을 통해서라니 유감스럽지만 꽤 효과적이다. 나는 느낀다. 우리가 고통에 조금 더 가까워 졌음을.
이날의 참석자
프린지 오성화, 남하나, 김민수, 박혜인, 채민, 이은주, 정진새
예술위 사무처장 전효관, 극장운영부 정영순
문체부 예술정책 과장 송윤석, 사무관 조민규
연극평론가 김미도
총 12인
출처: https://indienbob.tistory.com/1154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