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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지가 블랙리스트를 말한다] 3. 코끼리를 바라보는 어떤 시선
작성일 2020.03.03 / 작성자 seoulfringe
[프린지가 블랙리스트를 말한다]
3. 코끼리를 바라보는 어떤 시선 
 
글_샬뮈(서울프린지네트워크 프로그래머)

2020년 2월 17일, 프린지가 블랙리스트에 대해서 말하는 첫 번째 공식적인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첫째, 서울프린지네트워크 블랙리스트 관련 경과 일지를 공유하는 시간으로, 201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정리했다. 둘째, 블랙리스트가 기금배제라는 명확한 형태를 드러낸 2015-2016년 동안 프린지 내부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셋째, 모임에 참석한 모두가 블랙리스트에 대한 개인의 이야기를 나눴다. 축제 참여예술가, 예술행정가, 관객 등 다양한 위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방 안에 코끼리 같았다.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지만 쉬쉬하고 있던 사건. 이미 방 안을 벗어나서 광장을 헤집어 놓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얽힌 채 다쳤다. 오래되고 복잡한 문제여서 문제의 중심으로 닿기 위해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래야 퍼즐의 조각을 이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기획자의 경험으로 블랙리스트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블랙리스트 경과일지는 2012년 8월 당시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박근혜씨의 축제현장 방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축제 스탭으로 활동하던 시기라, 계속된 방문 거부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찾아왔을 때 당혹스러움과 불편한 감정이 뚜렷하게 기억한다. 이후 나는 2013년도 축제를 만들고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해외에 거주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긴 시간 거쳤고, 2016년 프린지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뉴스를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알았다. 2018년 귀국 후, 프리랜서 여러 활동을 하면서 다시 문화예술계에서 노동을 시작했다. 작년 10월과 12월에 걸친 하반기는 다소 어려운 시간이었다. 행정과 정산 업무를 맡아 ‘신나는 예술여행’ 공연기금을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했는데, 증빙의 기준이 까다로워서 추가작업이 계속되었던 탓이다. 예술위원회의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여러번 확인을 해도 현장에서 변수에 따라 오차가 생긴다. 길들여지지 않는것에 길들여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발견한다. 욱하는 마음에 기금 같은 건 받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행되는 기금이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입을 닫았다. 이어서 올해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모여 다원예술공연을 준비하고 있고, 얼마 전 서울문화재단에 제출한 창작지원금지원 서류가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 떨어졌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공연기금 마련을 위해 기업 예술재단에 기금지원서류를 제출해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부족한 금액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립의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성취는 통장으로 바로바로 입금되고, 상한가인지 하한가인지 표시되는 숫자를 원하지만, 예술은 그 일을 빠르게 할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사회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면, 예술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국가의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블랙리스트 사건이 국가의 예술지원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흔드는 지점이 되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드러난 문제를 수정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으로 이어져한다. 논의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지점이 있다.

 

우선, 기금을 신청하고 당락이 가려지는 과정에 대한 문제, 특히 지원사업 결정에 대한 투명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블랙리스트 해결을 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모든 예술 기금사업에 대한 평가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다시 예술 행정의 현장과 예술가/예술단체들이 갑-을 관계가 아닌 협업의 관계로 상생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예술지원사업의 평가에 대한 항목 / 수치화 방식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 자리가 있었으면 한다. 국가기관이 예술을 이해하는 방식이 제도의 방향성으로 이어진다. 제도를 만들었던 밑그림까지 들여다보는 기회로 이어져야 한다. 

 

세 번째는, 기금집행에 지나친 엄격함기준의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은 작업실행의 현실적인 업무와 맞물린다. 현장이 반영되지않은 행정의 편리함에 대해서도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을 시작으로 심도있는 논의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예술과 국가예술행정의 상호작용으로 다양한 현실적인 방안이 표면될 수 있는 새로운 좌표를 찾아가야 한다. 

 

블랙리스트를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국가권력과 검열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예술가들의 태도를 이야기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날 모임 자리에서, 정윤희 미술작가 (현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블랙위원회 위원장)는 블랙리스트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짚어주었다. 세월호를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통해서 어렵게 쟁취한 대한민국의 실천적인 ‘자유’ 의 시기이다. 언제든 다시 제주 4·3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사건 등 우리 역사의 아픈 상흔들이 목소리를 잃을 수도 있다. 오성화 대표는 블랙리스트 사태로 인해 국가로부터 소외되는 ‘공포’를 느꼈다고 말했다. 사회의 불행은 파급력이 크다. 한번 시작된 불행은 아주 쉽게 다시 시작될 수 있다. 모임자리에서 유독 집중하게 된 ‘당사자’라는 단어를 자주 곱씹어 생각했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도 자신의 경험으로 변환할 수 있는 예술적 상상력이 블랙리스트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한 지금 다시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소신과 신념에 대가가 따르는 결정 앞에서 많은 이들은 소신과 신념보다 생계와 현실유지를 택한다. 그들이 대단히 부도덕해서도 아니고, 때론 현실의 무게가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를 겪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어깨에 실린 생활의 무게가 버거웠을 것이다. 늦었지만 그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바른 목소리를 지켜준 분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미약한 글을 빌려 전하고 싶다.

 

대법원은 2020년 1월 30일 국정농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주범들에 대한 직권남용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또 다른 구성요건 요소인 ‘의무없는 일’에 법리 오해가 있다는 이유로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했다. 그리고 약 2주 후인 2월 13일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압박해 보수단체에 69억원을 지원하도록 한 혐의를 받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 대한 직권남용 혐의는 인정하고, 전경련에 대한 강요 혐의는 무죄로 판단해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판결문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대법원의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파기환송에서 유일하게 쉽게 읽히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 

 

‘의무’ 와 ‘강요’

 

의무는 마땅히 해야할 일이고, 강요는 억지로 맡겨진 일이다. 일을 행하려던 자가 국가이고 일을 해야하는 사람이 시민이었다면 의무와 강요를 구분짓는 일이 가능할 까?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있는 때만, 의무와 강요의 구분은 유효하다. 그 선택지 중에 하나가 밥그릇을 뺏는 것이면 이는 여지없는 강요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는 9473명이 있었고, 명단에 있던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이 후광과 무관하게 블랙리스트는 소리없이, 꾸준히 업데이트되고 있을 것이다. 모든 피해가 개인에게 오롯이 부과되지 않을 사회적 장치와 제도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더 늦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출처: https://indienbob.tistory.com/1156?category=226689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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