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5 포럼 '올모스트 프린지' 1일째 리뷰]
내 예술의 집은 어디인가 ?
_밀실과 광장과 복도와 거리를 넘어
_이세연(여행자)
수수께끼란 그쪽으로 끌린다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한다.
_모리스 블랑쇼「문학의 공간」
축제개최를 시작으로 독립예술의 방향과 길을 모색해온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올해로 18주년을 맞이했다. 독립예술, 청년문화, 비주류실천, 하위문화, 홍대 앞 문화, 새로운 경제망 등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서 변화를 겪어온 프린지는 2013년부터 상징과도 같은 '홍대 앞'에서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서서히 공간을 옮겨 올해로 3년째 축제를 진행 중이다. 90년대 폭발적이었던 홍대 앞 예술과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빠른 속도로 자본에 포섭되거나 상업화되고, 공간을 만들었던 젊은 예술가들이 높은 임대료에 밀려 다시금 외곽으로 밀려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프린지는 독립예술의 현 주소에 대한 고민과 보다 다양한 목소리와 언어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채널에 대한 탐색 끝에 살던 곳을 옮겼다.
살던 곳을 옮기는 것은 공간의 변화와 더불어 관점과 방향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주류', '가장자리'를 뜻하는 '프린지Fringe'라는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방향성은 여전히 유효하나, 그를 실행하는 장소가 하나의 상징권력 혹은 주류가 되어버린 홍대 앞에서 광장과 밀실이 함께인 텅 빈 경기장으로 옮김으로써 지역과 세대에 대한 고민을 체현하고, 새로운 언어와 목소리에 대한 보다 다양한 예술행동을 구체화하려는 변화의 첫 시작을 알렸다고도 볼 수 있겠다.
지하철 6호선 끝자락과 한강변에 인접한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경기와 공연이 있지 않을 때에는 대개 텅 비어 있다. 경기장 안팎으로 이렇다 할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깊은 밤에는 관객이 모두 떠난 뒤에 암전된 극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둠이 내린 고요한 광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기장 안쪽에 한 칸씩 구분된 작은 '사무실-극장'과 길고 먼 복도들이 하나의 커다란 원으로 '경기장-광장'을 감싸안고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창작자들에게 다양한 호기심과 실험을 상상하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다. 밀실이 광장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묵묵히 닫혀 있던 수백 개의 한 뼘 공간들이 창작자들을 만나 활짝 열리거나 부딪치며 새롭게 닫힐 때, 수천 평의 열린 공간도 그에 화답하는 창작자들과 함께 평소의 텅 빈 경기장으로써가 아닌, 전혀 다른 목소리로 응답하게 될 것이다. 밀실과 광장과 복도가 어떤 목소리로 무슨말을 할 것인지, 혹은 어떤 태도로 침묵을 표현할 것인지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우리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진실을 만드세요, 하느님
그녀와 손잡고 나가겠습니다
_진은영「거리로」
2002년부터 축제와 더불어 독립예술 활동을 일상적으로 장려하기 위해 '네트워크'에도 방점을 찍으며 상근구조를 강화한 '서울프린지네트워크'는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올해 축제를 여는 시작으로 '프린지포럼'을 개최했다. 프린지 안팎으로 함께했던 이들 혹은 어떤 식으로든 프린지와 독립예술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을 초대해 지난 5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 동안 포럼 '올모스트 프린지'를 개최한 것이다.
2015년 5월 8일, 첫날의 포럼은 두 가지의 세션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 세션('청년예술가의 창작생활_그 많은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가')의 패널로는 제도의 수혜를 받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의식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연출가 이은서, 의도적 탈 제도권을 지향하며 시인이 자신의 시를 팔아 월세를 내는 삶을 꿈꾸는 문학활동 독립출판물 '시월세집' 발행인 김경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을 통해 수많은 만남을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진 희곡전문출판사 '자큰북스'의 대표 김해리, 극적인 중심과 위계를 없애고 새로운 미장센으로 소수 취향 관객들을 상대하는 신개념극장 '출몰극장'의 배우 박한결이 참석해 저마다의 작업과 시작의 계기, 앞으로의 방향, 한 사람의 생활자이자 작업자로서의 고민을 나누었다.
두 번째 세션('내 예술의 집은 어디인가_오프대학로 탈홍대의 예술가들')의 패널로는 '자본 혹은 제도의 권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자본 혹은 제도의 담장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광대의 삶을 꿈꾸는 연출가 김서진, 극장을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을 추구하며 '의미를 담는 것을 버리고 의미 없는 것을 공연'하려는 즉흥 연극 연출가 김철승, 연극의 내용과 형식을 고민하며 다양한 장르의 작가와 협업하며 '무용적 연극','음악적 연극' 등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연출가 적극,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라운드로 나가는 민중 엔터테이너 혹은 자립 음악가 한받이 참석해 각자의 시도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과 그 방향이 만들어내는 '다른 길'의 기쁨과 슬픔, 너머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 많은 목소리와 가능성이 태동할 수 있도록 새로운 채널과 작품을 만들고, 거기서 생겨난 에너지들이 구획된 제도들 너머의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첫 세션과 두 번째 세션의 패널들 모두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이는 이 포럼을 기획한 프린지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렇다면 나 혹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생각해보니 누구의 요청이나 부탁이 없이도, 나는 자발적으로 여러분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이건 정말 상품으로서의 노래들이 아니다. 아픔의 노래, 기쁨의 노래, 나눔의 노래다. 결국 자립은 상품으로부터 벗어나 기체 상태로 노래하는 것이다. 구름이 되는 것이다. 노래가 구름이다. 햇빛과 찬란한 빛줄기.
_2014년 8월, 한받1)
1) 2014년 LIG문화재단의 커뮤니티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어 뮤지션 한받과 8명의 작가들, 23명의 합창 단원들이 모여 40년 전 당인리 기차선이 지나던 마포구의 길을 따라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무전음악(無電音樂) 퍼포먼스 <당인리선>'소개글 (http://www.ligarthall.com/program_detail.asp?place=&yy=2014&mm=0&num=769&lng=k§ion=E) 에서 발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당인리선 발전소 앞까지 합창단과 함께 노래하며 걸어갔던 한받 씨의 문장과 '시월세집'을 방행하고 있는 경현 씨의 네 번째 시집 147쪽에서부터 149쪽까지의 문장으로 대신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두 작가 개인의 문장이지만, 나는 이 문장들이 하나의 사회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는 각기 다른 삶을 대변하는 최선의 태도일 수 있다고 여겼다.
매일 시를 쓰고 글을 씁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시인이라 불리는 것은 송구스럽고도 부끄럽습니다.(...) 시월세집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에 이야기하고 싶던 것이 있습니다. 다시는 어떤 작가도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 자신의 힘만으로는 쉽게 집을 살 수 없는 우리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를 팔아 월세를 낸다는, 어쩌면 당연하지만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이 모습이 시와 삶이 하나 된, 시로써 삶을 살아내는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시인이나 예술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를 쓰고, 시처럼 살고, 시로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앞선 시인들에게 보내는 존중과 존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시월세집 <시집살이>는 제가 생각하는 시에 대한 이야기와 시처럼 사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담아보려 노력했습니다. 다시 한 번 시월세집을 팔아 '시집살이'를 하는 행위를 통해 시처럼 삶을 살아낸 앞선 시인들에게 찬사를 보내려 합니다. 언제나 '시를 쓸 때만 시인'이라는 다짐으로 시를 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2)
2) 김경현 시월세집 시리즈 『시집살이』p.147-149
어떤 사람은 광장과 거리에서, 어떤 사람은 밀실과 복도에서 저마다의 삶과 작업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목소리를 보고 듣는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공간이 혼재되어 있기에 각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무대와 삶의 기반이 되는 장소는 매번 뒤바뀌기도 할 것 이다. 그렇더라도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이름이 애틋하듯이, 저마다의 언어와 항구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혹은 우리에게는 규격화된 틀로서의 예술의 집이 아니라 삶으로서, 걸음으로서, 말함으로서, 움직임으로서의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구체로서 현상과 질문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과 질문을 가지고 끊임없이 구체를 통과하고, 질문하고, 두드리면서 움직임으로서의 거주공간을 새롭게 발명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PIXAR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자신의 집을 이고 진 채로 힘겹게 걸어가다가 작은 소년과 어린 동물을 만나 변화하면서 삶의 어느 중턱에서 오래 함께했던 집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듯이. 어쩌면 그 순간에는 밀실이나 광장, 복도와 거리의 구획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오래 곁에 두었던 집을 떠나보냄으로서 움직임으로서의 새로운 거주공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집 안에 머물면서도 집 안을 벗어나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예술의 가능성이란 그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안팎의 구획과 호명 뒤에 숨은 삶의 가능성과 변화에 주목하게 된 후부터 자신 삶의 새로운 챕터를 열고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웃던 할아버지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같은 방식으로 다시 떠나게 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충만한 채로 뚜벅뚜벅 살아 걷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기체 상태로 노래하듯이, 시를 쓰고 시처럼 살아내듯이.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삶이 허락하는 한, 계속 걸을 것이다.
_필자 소개: 이세연(노아)
여행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채 걷고, 보고, 듣고, 만나며 살고 있다.
침묵과 발화가 함께 있는 목소리를 꿈꾸며, 질문하고 사랑하는 삶을 지향한다.
저항과 실패가 반복되는 삶을 긍정하며, 늘 다시 문을 여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무엇보다 살아서 오래 들여다보고, 묵묵히 쓰고 걷는 일을 좋아하며,
당신과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메일주소) tpdus972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