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을 끝으로 2016년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올모스트프린지>포럼이 끝났습니다.
3회 모두 많은 분들의 참석과 열띤 토론으로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 프린지 사무국에는 성미산학교에서 온 독특하고 발랄한 인턴 친구 '뮁'이 있습니다.
포럼 내내 열의를 갖고 참여하며 어린친구 답지 않게 깊이있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뮁'이 <올모스트프린지>포럼에 관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여러분들께 공유합니다. :)
<올모스트 프린지포럼> 참가 후기
(올모스트 프린지는 서울 프린지페스티벌이 시작하기전 준비운동을 하는 자리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경험, 사례를 나누는 자리이다. 2015년에 시작한 올모스트포럼은 2016년 이 시기에 맞는 주제들로 구성 해 3일을 진행 했다.) 20대 부터 50대까지 예술에 관심이 있고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는 많은 선배들을 만날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예술을 중심으로 모인 자리라서 각 주제들에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놓친 게 있지 않나 싶다. 20대와 예술, 사회적합의와 예술 그리고 도시와 예술로 보았을 때 쉽게 연결되는 것과 잘 와닿지 않는 것도 있었던 거 같다.
그 중에서 제일 관심있고 인상깊었던 주제는 ‘이 시대 20대에게 예술은 가능한가’였다. 20살을 코앞에 두고 부모님 밑에서 바라보는 스무살은 험난해 보이면서도 궁금하고 불안하다. 그렇다고 겁이 나지는 않지만 반갑지도 않다. 그런 나에게 20대의 삶이라는 키워드 뿐만이 아니라 예술이 들어가서 더 흥미로울 수 있었다. 나에게 예술은 표현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과연 예술과 삶이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지 일단 묻고 싶다. “예술가에게는 예술이 일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는데, 사실 일상과 일을 떼어 놓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대안학교에서 12년동안 다니면서 하고싶은 것들은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듣는 얘기는 단지 하나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만 그렇게 해.”라고 들어왔고, 10명에게 기쁨을 줘도 한명에게 슬픔을 줬다면 쉽게 무너지는 나는 그 점만을 조심하면서 나를 표현하고 즐겨 왔다. 하지만 20대(어른)의 예술은 어쩐지 폐끼치는 거 이상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게 문제인지 모르겠다. 1부에서 고난들을 겪어낸 그리고 겪어내고 있는 20대들의 이야기와 다짐들을 듣고 2부에서 20대가 아닌 두 분에게 예술가들의 역할과 조언을 들었지만, 결국에는 살아가고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서 연대를 하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날 나에게 정말 꽃힌 말은 보드카를 마신 26살의 예술가의 이야기였다. “이미 여기 있는 분들이 살아남은 자들이라고 생각해요. 세대를 떠나서 이미 사는 거 자체가 살아남기인 사람들도 있어요. 물론 잘 살고 있다는 이들에 비해 예술가 20대, 30대가 비교적 살아남기가 힘들겠지만 이런 얘기를 하며 이 자리에 모여있는 거 자체는 이미 살아남은 자들이 아닐까.”(약간 내 생각이 들어간 말이다.)이 얘기를 들으니 최근에 학교에서 만난 미얀마의 민주화운동가 마웅저선생님과 나눈 얘기가 생각난다. 버마의 학교커리큘럼에는 음악, 미술, 체육같은 수업이 없다고 한다. 예부터 그런 수업들이 없었고 그렇게 자라온 부모님들과 사회는 그 수업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겐 음악, 미술, 체육을 배우는 것보다는 지금 살아남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예술은 낭만주의나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일상이 없는 삶이 없듯이 아직도 나에게 예술은 일상과 떼어놓을 수 없고 이 사실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을 거 같다.
두번째 주제는 ‘이 시대 검열과 자유는 어떻게 맞서는가’였다. 지금까지 나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검열을 받아 온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검열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경험이 없어서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많은 분들과의 이입도가 다르지 않았나 싶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검열사건들이나 기본지식이 필요할 거 같지만 아쉽게도 1부에 참여하지 못해서 나는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해야 되었다. 이연주 연출가님의 “검열을 하는 건 예술가의 몫이 아니다. 끊임없이 발견해 내야한다.”라고 한 말은 물음표를 가져왔다. 검열의 몫이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맡겨야 되는 것인가? 검열을 하지 않고 나오는 표현들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것들의 폭력성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얘기가 검열사건을 전제로 두고 내면적으로 이뤄져서 오히려 더욱 잔인한 검열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역시 이입하기 힘든 주제라고 다시한번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검열에 계속해서 따라오는 혐오라는 단어가 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어디서 누구를 향하든 간에 혐오, 그니까 싫음과 부정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좋은 결과물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편했다.(그래서 검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인가) 하지만 3부에서 내가 한 얘기는 정말 터무니 없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분들을 위해 얘기를 하자면“혐오가 아닌 탈일지라도 보호와 배려 같은 단어가 자리잡길 바래요.” 검열로 인한 폭력보다 표현의 폭력을 더 경험을 해왔고 그래서 그렇게 오는 폭력에서의 검열이라면 혐오가 아닌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하기 위한 검열이 아닐까 싶은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욱 많고 오히려 그런 탈을 쓰고 마주하는 혐오로부터의 검열은 오히려 구역질 날게 예상된다. 검열의 문제는 폭력적인 표현들로 부터의 보호가 아닌 어쩌면 엄청난 편견과 (별로 쓰고 싶지않은 단어지만) 혐오로 부터 오는 검열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주제는 ‘이 도시는 예술활동을 원하는가’였다. 일단 도시가 뭔지 궁금했다. 빽빽한 건물들과 사람들이 있는 공간을 얘기하는 것인가?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사회를 얘기하는 것인가? 각자의 관심사에 몰두해서 피폐해진 지역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나는 뭐가되더라도 사람에 주목을 했다. 사실 나는 예술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심 밖이었는데 그 이유는 예술이 모두를 즐겁게 할 거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단 예술활동이 도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사회의 문제들로 받는 영향을 포럼을 통해 감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2부에 엄마인 동시에 예술가인 이은서님과 복태를 만난 게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각자의 경력과 경험을 들었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의 현재 생활에 연결된 이야기를 들으니 막 기분이 좋아졌다. 삶의 모순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거 같은 두 엄마가 멋있어 보였다.(물론 이전의 많은 분들도 멋있었다. 그치만 특히 멋있었다.) 사실 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번 주제 사이에서 애매하게 끼어있는 거 같아 아쉬웠다. 3부에서 이리카페의 얘기가 나오고 질문이 오갔지만 젠트리피케이션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깊이 들어가지 못한 듯 싶다. 젠트리피케이션자체가 예술가와 상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에도 닿아있는 그래서 사회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될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리카페 사장님이 말씀을 들으면서는 금전적으로 오는 피해 보다는 집주인과 상인의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마음의 상처도 챙겨가야 될 거 같았다. 또 테이크아웃드로잉을 보고 예술가들의 행동에 놀라고 감탄했지만 결국엔 좋은 집주인을 만나는게 최선인 현실이 슬프기도 했다.
3일오후 내내 포럼을 들으니 꽤나 피곤하다. 이 포럼을 준비한 프린지 스텝분들은 장난아니시겠지.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포럼을 준비하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매 포럼이 귀하고 특별 한 거 같다. 이 포럼에서 얻은 것이 정보보다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나누고,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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